Dave
조지 로슬야코바는 언제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믿으며 사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는 알파벳을 깨우치고 혼자서 제대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된 나이 이후의 사십 년이 넘는 인생 대부분을 말 몇 마디로 그를 밟아 뭉개버릴 수 있는 다른 이들의 눈치나 살피며 보냈다. 러시아 이민자인 그의 아버지 알렉세이는 늘 어린 조지가 잠에서 깰 때마다 옆방에서 독한 냄새가 나는 술병이나 빨고 있었고, 어머니 마리테스는 덥수룩하게 뻗친 머리로 집에 하나 남은 리어카를 끌고 나가 케찹을 잔뜩 뿌린 핫도그를 팔곤 했는데 날씨가 안 좋아 그조차도 안 되는 날이면 근처 낡은 식료품 가게에서 몰래 당근이나 달걀 따위를 훔쳐와 소금투성이 국을 끓여주곤 했다. 조지의 하나밖에 없는 형은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먼저 집을 나가버렸다. 조지 또한 열세 살이 되던 생일에 마리테스의 방 서랍에 있던 지폐 다발만 집어들고 집에서 나가 마약을 팔며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는 친구들 사이로 끼어들어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스물 한 살에 험악한 인상의 포주에게 바가지를 쓰고 별로 예쁘지도 몸매가 환상적이지도 않고 그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은 싸구려 창녀와의 하룻밤을 샀다. 그는 그녀의 방에 단 한 번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후에 자신이 임신했으니 조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창녀를 그의 싸구려 아파트 앞에서 맞이해야 했다. 마음같아서는 여자를 흠씬 때려준 뒤 낙태를 강요하거나 나몰라라 어디다 버려둔 채 돌아오고 싶었지만 포주는 얼굴이고 몸매고 슬슬 망가지기 시작하는 그 여자를 자신의 가게 밖으로 내쫓은 뒤 젊은 아이들로 채우고 싶어했고 조지는 그를 거절하고도 사지 멀쩡하게 일을 계속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를 데려가야 했다.
불행한 조지 로슬야코바에게 단 한 가지 재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가장 최악의 상황만큼은 언제나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직감이었다. 그 은총만큼은 조지가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에게 붙어서 어떻게 알랑거려야 할 지 모두 속속들이 가르쳐 주었다. 조지는 그 선택들이 가져다준 것에 전혀 행복해 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어린 나이에 부와 명예가 아니라 갑작스런 아내와 그 뱃속의 딸을 남겨주었지만 대신 술에 취한 채로 포주에게 여자를 데려갈 수 없다며 객기 부리며 대답했다가 두들겨 맞아 비명횡사하는 식으로 그의 생을 끝내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의 인생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연속이었다.
멜이 처음 조지에게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을 때 조지는 아직도 주위 형들에게 이름이 아니라 신입, 멍청이, 따까리 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새파란 열아홉 막내에 불과했다. 약속 장소인 생트 프레지아 서부 번화가의 어느 카페 앞 대신 그 옆 어둑한 좁은 골목에서 조지는 에이든을 처음 만났다. 야, 꼬마. 꼬마라고 불리기에는 훌쩍 큰 어린애였지만 십대 때 아이들이 으레 그러듯이 조지는 서너 살 많은 걸로도 열 다섯 난 어린애와 자신은 성숙함 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믿는 중이었다. 꼬마, 너 컴패니에서 보낸 놈 맞지?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조지가 앞서 가는 대로 순순히 따라 차를 타고 빌딩 앞까지 따라왔다. 조지가 먼저 낡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9층 버튼을 누르자 에이든은 한쪽 구석 모서리에 몸을 구겨넣듯이 살짝 몸을 움츠린 채로 서서 그 뒤로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모두 하나하나 관찰하듯 살펴보기 시작했다. 딩동. 9층입니다. 에이든이 조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하자 그가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 끈이 엘리베이터 손잡이에 걸려 주욱 늘어지며 지퍼가 활짝 크게 열렸다. 커다란 공책 하나와 볼펜 두어 개, 그리고 자잘하고 반짝거리는 것들이 비스듬하게 튀어나온 책 경사를 타고 그 위로 굴러떨어졌다. 수북히 모은 동전과 지폐 다발, 손목시계, 값이 좀 나가보이는 여성용 반지나 귀걸이, 어디서 주우거나 훔쳤는지는 몰라도 대충 그런 것들이었다. 조지가 귀찮은 얼굴로 혀를 차고는 한 손으로 엘리베이트 문을 잡고 허리를 숙여 뭐라도 좀 같이 주워주려 했을 때였다. 탁. 에이든이 건드리지 말라는 듯이 그의 손을 세게 쳐내고는 금방이라도 칼을 꺼내쥐고 그에게 덤벼들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잔뜩 날이 선 모습이었다. 아, 그래, 안 건드릴게. 조지가 황급히 손을 떼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말로 해, 새꺄. 벙어리냐? 이런 놈들이 나중에 꼭 대형 사고 쳐놓고 휘말려서 뒤지지. 에이든이 조지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에 축 처진 가방 입구를 열어 쥐고는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팔이 닿기엔 좀 멀리까지 날아가버린 동그란 반지 같은 것들은 그가 슥 눈짓을 하자 자기 혼자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와 그의 무릎 앞에서 멈춰섰다. 신기한 능력이었다. 다시 배낭 지퍼를 모서리 끝까지 완전히 닫은 에이든이 이제 가도 된다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것이 조지가 처음 들은 에이든의 목소리였다. 조지는 그의 불편한 눈을 보았다. 창 밖의 가지에서 곧 떨어져내릴 늦은 여름의 나뭇잎보다도 연약한 색이었다.
멜 그레이스톤이 에이든에게 정식으로 그의 회사에 들어올 것을 제의한 것은 그가 컴패니에서 회사로 세 번째로 나온 파견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조지는 그 세 번을 모두 몇 달 전에 장만한 싸구려 중고차를 몰고 에이든을 처음 만났던 그 거리 앞으로 그를 마중나가야 했고, 에이든은 언제나 형형한 눈빛과 함께 뺨이나 손등 어딘가에 새로 만든 상처를 하나씩 달고 와서 예의 커다란 배낭을 맨 채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한 번은 그를 배웅 나온 시나라는 컴패니의 젊은 여자 연구원이 그 상처가 무엇인지 대충 말해주고 돌아간 적도 있었다. 컴패니에서 제시하는 일들 중 직접 해결할 수 있고 돈 되는 일은 아무 거나 다 받아서 닥치는 대로 처리하고 다니며 먹고 살았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에이든에게 멜은 이미 3년차인 조지와 같은 금액의 월급을 제시해 결국 내일부터 출근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방 안에서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조지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했던 그의 눈치와 직감이 오늘만큼은 닥치고 있어, 조지, 하고 경고했기 때문에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에이든의 키가 슬슬 자기를 앞지르기 시작했을 때 조지는 그가 처음 사람을 죽이도록 내버려두었다. 고의였다. 자기 혼자만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우울한 척 무게잡는 것이 얄밉기도 했고 이 쪽 세상이 덜 자란 남자애 하나에겐 그렇게 친절하고 쉽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려줘서 조금 골려주고 싶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써먹을 만한 아랫사람이 생겼는데도 그가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 직접 처리하기 귀찮았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남에게 무언가를 시킨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생소한 쾌감이었다. 나는 다른 일이 있으니까 네가 직접 입막음하고 와. 에이든은 조금 복잡해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지는 멜의 이름을 팔았다. 멜이 그러라고 했어. 에이든이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없는 적개심, 자신 또한 누군가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질타할 수 있다는 처음 느껴보는 권력감. 저런 어린애는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은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어우러져 치졸하고 사소한 저주로 남았다. 어디 하나 크게 실수라도 한 채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에이든이 생각보다 엄청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서 조지는 조금 실망스러운 얼굴로 텅 빈 사무실 앞에서 그를 맞았다. 뭐야, 어떻게 했어? 잘 처리했어요. 에이든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차분하고 침착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조지의 예상을 깨고 노발대발한 것은 에이든이 아니라 멜이었다.
보스도 알잖아요. 솔직히 그런 일엔 저보다 그 녀석이 더 적격이라서 시킨 거예요. 어제도 자기 혼자서 눈 하나도 깜짝 안 하고 실수 없이 해냈잖아요. 변명하는 조지의 새파랗게 멍든 뺨을 향해 멜이 어딘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며 다시 한 번 발길질을 날렸다. 녀석은 그런 일을 할 준비가 안 되어있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고 조지는 생각했다. 멜이 조지를 때리던 접이식 의자를 이내 저 멀리 던져버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일을 시키려고 데려온 게 아니야. 그는 아직... 어리잖아. 마치 다 큰 어린이를 아직까지 과보호하는 부모와도 같은 태도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조지는 멜이 요즘 들어 왜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관대했던 지를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이 조지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다닌 것도 아닌데 어떻게 언제부턴가 그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옷들과 깨끗한 구두를 신고 매일 아침 택시로 출근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모두 깨달았다. 왜 그가 그렇게 겁 없이 어깨를 꼿꼿하게 펴고 다닐 수 있었는지, 아무도 옛날 조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흔한 꼬봉처럼 취급하지 않았는지. 왜 그가 더 이상 옛날의 그 배낭을 애지중지 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는지. 조지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조지가 멜의 그런 멍청한 가족놀이에 직접 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런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이제 와서 동경하기엔 그는 너무 그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채로 오래 살았다. 그는 좀 더 현실적인 것들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행운들을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질투했다. 조지는 그와 같이 불행했던 이들은 모두 계속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똥통 안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옳다고 믿었다. 그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쉽게 얻어버린 이들을 싫어했다.
그 날부터 조지는 에이든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조지가 에이든을 싫어한다고 해서 에이든이나 그의 인생에 무언가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조지는 고작 그런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크게 눈에 띄는 짓을 할 마음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몇 달 후에 멜이 조지를 그의 사무실 안으로 불렀을 때, 그는 에이든이 책상 앞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오늘 아침 배달된 신문이나 읽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1면에 난 어느 정치인의 이혼소송 기사가 문득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조지는 멜이 몇 년 전 아내와 결국 이혼하면서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들까지 결국 빼앗겼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자리를 저런 놈으로 채우고 싶은 거라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텐데. 비쭉이는 조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멜이 하고 있던 전화도 끊고 그를 불렀다. 조지, 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조지는 일부러 못 들은 척 잠시 대답을 피했다. 멜이 다시 그를 두어 번 부르자 반대편 소파에 앉아있던 에이든이 신문을 접으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아마 멜이 그 상황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일 것이었다. 새 신발이 필요해서요. 이제는 제법 청년 티가 나기 시작하는 아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신발은 내가 사줄 수 있단다. 필요없어요. 사람을 죽이고 신발 값을 벌겠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멜이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손 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말을 제대로 못 있다가 결국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럼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조지는 태생부터 못된, 세상에 다시 없을 악인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도덕심이 똑바로 박혔다고도는 절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물 두 해 동안 그의 인생을 꽉 억눌러온 주변 환경과 열등감이 그의 성격을 비틀어놓았다. 사실 그가 예전 그 날 자기 일을 에이든에게 미루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쯤 어떻게든 멜의 계획이 이런 식으로 잘못 굴러갔을 것임은 분명했다. 그래도 이 어긋남이 어쩌면 자신 때문에 출발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지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 이런 걸로 인생이 행복해졌다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 두 명이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남들의 불행한 면을 보는 것으로도 두어 시간 정도 기분이 나아진다고는 느끼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조지 로슬야코바는.
조지가 출근할 때마다 그 모든 꼴뵈기 싫은 광경을 전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말했듯이 멜이 원했던 그 놈의 망할 가족 사업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임을 한참 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에이든을 보았다. 멜이 아무리 돈과 애정을 아무리 쏟아부어주어도 그는 블랙홀처럼 언제나 부족한 듯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갈구라는 것이 버려진 아이들이 흔히 받고 싶어했던 애정이나 온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같은 그러한 따뜻하고 희망 넘치는 생기들이 아니라 항상 제 손아귀 안에 확실한 무언가를 더 많이, 더 제대로 움켜쥐고 싶어하는 그런 훨씬 기분 나쁘고 어두운 색의 종류였다는 게 문제였다. 조지는 사람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평생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성공한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주위에서 누가 위로 치고 올라갈 사람이 될 것인지는 읽어낼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에이든이 그에게 멜을 배신하라고 내뱉었을 때조차 조지는 놀라지 않았다. 에이든이 딱히 그를 큰 전력으로 치거나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해서 그를 끌어들였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는 어쨌든 멜이 조지에게 관리를 맡긴 돈과 장부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조지를 포섭해야 했다.
장부부터 넘겨. 에이든이 그에게 언제부터 그렇게 무례하게 말했는지는 조지가 기억할 수 없었다. 에이든과 그가 자라면서 어느새부턴가 둘 사이에 있던 힘의 관계가 역전되었고, 그를 따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화했다. 조지와 에이든 모두 그런 권력의 흐름을 잘 파악할 줄 알았다. 이제는 에이든이 조지를 아랫사람 부리듯이 했고, 조지는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마다 저 새끼가 어릴 적엔 내 말에 빌빌 기었는데, 하는 식으로 혼자 치졸하고 사소하게 자기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관이었다. 치졸하고 사소하게 살더라도 그는 최대한 오래, 그리고 길게 목숨을 유지하고 싶었다.
에이든이 멜보다 친절한 상사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윗대가리가 바뀌면 지금보다 생활이 더 좆같아질 것임을 알면서도 조지는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멜의 신뢰와 쥐꼬리보다도 얇았던 의리를 팔고 지금 당장의 목숨을 얻었다. 그것이 1차적인 이유였지만 만약 에이든이 직접 찾아와서 그의 안전을 쥐고 위협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조지는 그 제안에 단 몇 분 안으로 넘어갔을 것이었다. 세력이 갈라진다면 나이도 들고 정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인간보다는 좀 더 젊고 힘있고 교활한 남자의 측에 붙는 것이 그에게도 이득이었다. 그의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지는 자신이 저지른 선택에 이번에도 만족해했다. 다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왕의 머리를 잘라내기로 한 계획 막바지에서 갑자기 사무실까지 올라가는 복도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밀쳐내며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오는 고등학생 한 명이 끼어들 것이라고는 아무도 그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이상한 놈이 사무실로 달려들었다는 말에 아래층을 보고 있고 있던 조지가 멜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에이든이 이미 혼자 상황을 모두 정리한 뒤였다. 씨발 새끼. 죽여버릴 거야. 쓰레기만도 못한 개새끼가... 이미 일찍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박살이 났는지 불청객은 온 몸에 타박상을 달고 마지막 남은 힘으로 간신히 욕만 줄창 내뱉고 있었다. 조지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에이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고딩 새낀 누구요? 조지가 묻자 에이든이 한참 뒤에 대답했다. 멜 아들. 처리할까요? 이번에는 에이든이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아니, 그냥 어디 병원에다 버려놓고 와.
조지는 에이든의 발 앞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멜의 시체에 눈길을 주고는 블리스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이 들어있을 주머니를 뒤지며 나머지 한 손으로 쓰러진 고딩 새끼를 들쳐메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달려왔는지 그가 메고 온 가방에 달린 반듯하고 네모난 명찰이 바닥에 질질 끌리다가 툭 떨어졌다. 데이브 그레이스톤. 조지가 문을 열고 나가자 그 사이로 흘러 들어온 빛에 명찰이 잠깐 반짝였다. 방 안에는 에이든과 멜의 시체 둘이서만 남게 되었다. 조지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블리스의 번호를 힘겹게 누른 뒤 몇 달 전 찾아온 에이든을 보며 했던 생각을 마음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젊고.
힘있고.
...교활한.
일주일 후 조지가 수금 업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막 빌딩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린 데이브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매 주 월요일 저녁에는 언제나 시덥잖은 복수나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칼을 들고 찾아오는 멍청한 놈들이 있었다. 둘은 건물 앞까지 잠시 걸었다. 세상 좆같지? 담배 필래? 데이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비 유리문 앞에 다다르자 조지가 이제 가라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쨌든 못 들여보내줘. 거기서 되돌아오는 차분한 질문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깔을 한 주제에 조금 뜻밖의 것이었다.
"우리 아빠 회사였는데 일자리 하나도 못 줘요?"
그 말을 전해들은 에이든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둬. 조지는 십 년이 지난 아직도 데이브가 왜 다시 그 빌딩으로 돌아왔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조지가 그였다면 멜이 집에 남겨놓은 돈을 가지고 어딘가 멀리 도망쳐서 최대한 조용하고 풍족하게 남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처럼 아무리 비참하고 의미 없더라도 일단 자기 목숨을 제일 높은 가치로 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사람이 아니었다. 조지가 문을 열어주면서 들어오라고 하자 데이브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굳게 다문 입술로 계단을 두세 칸씩 성큼성큼 걸어올라갔다. 조지는 데이브가 들어오고 나서 텅 비게 된 바깥을 한 번 보고는 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런데 나 대학 붙어서 학교 가야 하는데. 파트 타임도 받나요?" 어제 처맞다가 맛이 갔나, 사채업에 뭔 파트 타임이 있어. 조지는 하고싶은 대로 해주라는 에이든의 말을 떠올리며 그에게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짙은 색 복도 카펫 위에 뻐근한 발목을 툭툭 털던 데이브가 일주일 전부터 이제 에이든의 것이 된 사무실 쪽을 보며 빈정거렸다. "씨발같이 친절하네." 주말 전에 바꿔달은 사무실 앞 명패가 이미 떨어지기 시작하는 햇빛 끝물을 받아 우울하게 빛났다. 자세한 얘기는 그…. 거기서 조지는 이제 에이든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몰라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들어가서 직접 얘기해봐,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지금 와서 둘을 직접 대면하게 두는 게 옳은 결정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지는 에이든이 설마 평범한 남자애 하나 제압하지 못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으로 일단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조지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데이브가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멜과는 생각보다 별로 닮지 않은 시퍼렇게 날이 선 눈이었다. 조지가 아주 옛날 멜의 명령으로 마중나간 적이 있었던 독기 서린 어떤 소년을 기억나게 했다. 그는 꺼림칙한 기분으로 아까 못 핀 담배라도 피러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 때, 언제나 그를 가장 나쁜 길에서만큼은 구해주었던 어떠한 직감 같은 것이 그에게 데이브를 똑바로 보라고 명령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는 데이브를 보았다. 조지 로슬야코바는 젊고, 힘있고, 교활한 데이브 그레이스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