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제대로 열리지 않는 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몸으로 밀어내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한 번도 정리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그 날 아침에 벗어던지고 나온 게 분명한 옷가지가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있었다. 그는 아직도 가지런한 상태의 책장과 십 년 동안 한 번도 작동한 적이 없었을 구식 라디오 카세트 버튼을 하나하나씩 눌러보았다. 딸깍. 딸깍. 되감기, 빨리감기, 재생, 일시정지, 마지막으로 정지 버튼을 누르자 쑥 내려가 있던 재생과 일시정지 버튼이 동시에 탁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튀어올라 돌아왔다. 단조롭게 딸각거리는 소리는 선명했지만 한참 전에 끊긴 전기에 카세트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바깥으로 담쟁이 덩굴이, 안으로는 먼지가 잔뜩 낀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어두운 집 안을 비추었다.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왼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의 통화 목록을 열어 제일 위에 있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말씀하세요. 아까 전에도 들었던 얇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와 데이브의 귀에 닿았다. 30분 전에 전화했던 데이브인데요. 아까 말한 대로 처리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입금은 지금 바로 해드릴 수 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무언가 키보드를 타닥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서류 상으로는 멜 그레이스톤 씨의 소유로 되어있는데요, 이 주소가 맞습니까? 뻑뻑한 침실 문고리에 잔뜩 쌓인 새하얀 먼지를 살짝 불어내며 데이브가 대답했다.
네.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도 안 살거든요.
방화
데이브가 곤죽이 된 채로 널부러져 있는 레이너의 얼굴을 발로 툭툭 쳤다. 너무 심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깨진 채 레이너의 몸으로 거처를 옮긴 창문 유리를 바라보다 그의 팔에도 박힌 손바닥만한 유리 한 조각을 뽑아냈다. 나 없는 쪽 창문으로 깨서 좀 보냈으면 안 돼요? 나 이거 병원비 줘야해요, 에이든. 깊게 파고들어간 것은 아니었는지 상처가 벌어진 자리에서 피가 살짝 번지다 멈추었다.
"망할 새끼. 능력 있으면 의뢰인지 뭔지나 받아서 처벌어먹고 살지, 갚지도 못할 돈을 빌려놓고 여기 와서 지랄이야. 일찍 뒤지려고."
데이브가 어색한 분위기를 가르며 레이너의 얼굴에도 스쳐박힌 얇은 유리 조각들을 하나하나 뽑아내주었다. 그는 복도에서 방황하고 있을 조지를 불러서 또 청소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에이든이 피를 뚝뚝 흘리는 레이너와 그를 일으켜 세우려는 데이브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레이너가 무엇을 시도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절벽 위에 선 자들의 생각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둘은 의도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서로 물어보지 않았다. 데이브 본인이 겪은 것은 시각보다는 청각의 조종에 가까웠다. 마녀들이 머리 헤집을 때 특유의 윙윙대는 귀 울리는 감각과 함께 마지막으로 젊은 에이든의 목소리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멜이 나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쨍그랑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팔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은 데이브는 난폭하게 깨진 유리와 사무실 안에 멍청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생생하게 남은 목소리에 비해 그가 무슨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그의 옛날 집과 같이 뿌옇게 먼지가 가라앉은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데이브의 정신은 전혀 건강하지 않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이고 온전한 상태였다. 이상한 꿈도, 환각도, 플래시백도, 그 어떠한 종류의 괴로움도 이때까지 겪어본 적이 없었다. 데이브가 그런 식으로는 처음 겪는 충격의 후유증을 떨쳐내려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흔들고는 일어섰다. 이 쯤 되면 한 마디는 대꾸해줄 때가 되었는데. 에이든은 평소보다도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걸로 유리도 깰 수 있는지는 몰랐는데. 아무리 급했어도 사람 몸을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블리스가 싫어할 거예요." "……."
그는 문득 에이든이 무엇을 보았을지 궁금해졌다.
"의도한 정도로만 날아간 거 맞아요?"
에이든이 대답하지 않았다.
시나 박사님한테 다시 전화 왔었어요. 종말이 어쩌고가 무슨 소리예요? 당신 죽어요?
뻔뻔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본 지 삼일 째의 일이었다.
이런 짓을 평생 해오면서 고작 경고 한두 번에 무서워서 몸을 사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받은 돈에서는 언제나 떨칠 수 없는 처절하고 끈적한 원한과 증오가 묻어났다.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은 좀 더 가깝고 어두운 곳에 있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넘겨준 지폐 다발을 손으로 만질 때마다 데이브는 그 안에서 속삭이는 수많은 감정과 욕망들, 종이 냄새가 뒤섞여 나는 향기에서 그가 가진 것과 같은 어떤 것을 맡을 수 있었다. 가장 침착하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그 무엇보다 뜨겁게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종류였다. 아주 옛날 그의 안에서 순간적으로 차고 올라왔던 것보다 훨씬 능숙하게 정제되어 있었지만 그만큼 더 날카롭고 깨끗하게 벼려진 채로 묵직하고 단단하게 마음 한 켠에서 웅크려 앉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데이브의 입술 끝을 톡톡 두드리며 우아하게 말했다. 그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지. 네가 할 일이 있잖아. 데이브가 착실하게 그의 말을 들으며 에이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직접 죽이고 싶어요? 이유를 알 수 없이 평소보다 훨씬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마녀잖아요. 얘는. 데이브가 흙더미가 묻은 운동화 끝을 레이너의 자켓 위에 벅벅 닦았다. 아니, 블리스에게 넘겨. 어제 들었던 명령과 비슷한 어조였다. 그 어제도 그 어제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마 내일도 언제나와 같이 그런 방식으로 말할 것이다.
데이브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 마녀 레이너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사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야, 이번엔 뭐 깨졌어? 미친! 너 피 나! 복도 안쪽에 앉아있던 조지가 제일 먼저 달려와 피가 번진 그의 팔뚝을 보며 말을 걸어주었다. 뭐 깼어? 왜 너까지 다쳤어? 그 새끼가 결국 일 쳤어? 너 나가래?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조지." 데이브가 씩 웃었다. "나라면 내 앞에서 입조심 할 거야. 옛날처럼 다리 작살나고 싶지 않으면." 조지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왼쪽 다리를 다른 쪽의 뒤로 숨기듯이 뒷걸음질쳤다. 조지는 2년 전에 돈을 몰래 빼돌리다 현장에서 바로 그에게 들통난 적이 있었다. 데이브는 그의 다리뼈를 두 동강으로 만들어준 후에 차액을 모두 돌려놓으면 에이든에게는 알리지 않겠다고 말해주었고, 조지는 눈물과 코피를 동시에 흘리는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얼마나 착한데. 팔다리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로 병원에 누워 있던 조지의 입에 손수 담배를 물려주며 데이브가 말했다. 난 누구랑 달리 적어도 경고는 해 주잖아, 이렇게. 그렇지? 그래서 지금 또 다른 경고를 하나 해주려고 하는데. 하나 들어볼래? 대신 에이든 앞에서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장난스러운 웃음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협박을 힘 약한 조지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후덥지근하게 가라앉은 지하주차장 아래에서 데이브는 축 늘어져 무거운 레이너를 트렁크 안으로 굴려넣고 문을 닫았다. 한숨을 내쉬며 땀을 훔친 그가 운전석에 올라앉아 휴대폰을 꺼내 2번 버튼을 길게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지금 바로 출발할 거예요. 마음 바뀌면 블리스한테 넘기기 전까지 전화해요." 그 역시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밝고 유쾌한 목소리였다. "에이든이 죽으면 안 되잖아요." 진심이었다.
블리스가 언제나 그렇듯이 다정하고 기쁜 얼굴로 그를 맞았다. 닥터 샌더스*! 데이브가 웃으며 블리스의 동그란 금테 안경 근처를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려는 레이너의 머리를 세게 쳐서 다시 잠재운 채로 블리스의 손에 완전히 넘겨주기 전까지 에이든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대신 한참 뒤에 걸려온 것은 친구의 전화였다. 안녕, 데이브. 오랜만이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Evening, Dave. 저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 11시, 오스본 거리 46번지. 에안이 불러준 주소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활활 타오르는 그의 옛날 집을 차에서 내려 직접 보는 것이 그가 예상했던 것만큼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네가 구경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지. 너무 늦어서 이미 반쯤 탔지만..." 에안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알고 데이브를 불렀을 리는 없었다. 그저 중간 단계를 통해서 의뢰가 들어왔고, 괜찮은 기회다 싶어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데이브는 그렇게 믿었다. 그는 칠이 다 벗겨진 울타리가 삐걱대는 마당을 가로질러 에안의 옆에 섰다.
"너 여기 어딘지 알고 의뢰 받은 거야?"
"여기가 왜? 오스본 거리?"
"아냐. 됐어."
바람도 안 부는 뜨거운 여름밤 아래에서 새하얀 집이 별처럼 불타올랐다.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이브는 다 타들어가는 현관 쪽을 보았고, 에안은 그 옆에 위태하게 선 기둥을 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화요일. 버스 끊겼을 것 같은데, 차 안 가져 왔으면 돌아가는 길에 태워줄까. 그래. 영양가도 집중도 없는 대화만 잠시 오갔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가 직접 열고 들어갔던 현관문이 뼈대만 남아 계단 위로 툭 굴러떨어졌다. 옛날에는 저 좁은 문으로 잔디 깎는 기계를 꺼내겠다고 끙끙대던 때가 있었는데. 팬케이크를 만들어준답시고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그의 아버지가 웃으며 걸어나와 문 틈 사이를 지나갈 수 있게 기계 뒤편으로 길게 튀어나온 손잡이 부분을 직접 접어주었다. 차가운 금속 케이스 위로 새하얀 밀가루가 묻었었다. 데이브는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오늘 아침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가져나온 작고 네모난 무언가가 손끝 아래로 닿았다.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던 새까만 것이 때가 왔음을 알고 팔을 뻗어 그 옆에 있던 날카로운 칼을 쥐었다. 옆에서 꿈지럭대는 손을 보고 에안이 그게 뭐냐고 물었다. 데이브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라이터. 너 담배 안 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게, 너 가질래? 아니. 됐어. 만약 그 때 에안이 거절하지 않았어도 과연 자신이 정말 그걸 넘겨줄 수 있었는지 데이브는 알 수 없었다.
몇 발치 떨어진 곳에서 지붕을 받치고 있던 왼쪽 목재 기둥 하나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위험하니까 조금 물러설까. 에안이 데이브를 보았다. 그는 이제 듣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생이 끊어져가는 건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데이브? 에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데이브가 입을 열었다. 에안, 내가 옛날에 말했던 것 기억나지? 내가 할 일이 있는데, 그게 다 끝나면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한 것 말야. 그는 불길만큼이나 뜨거운 눈으로 앞을 주시했다. 결국엔 그가 넘길 수 없었던 과거가 타오르고 있었다. 새파란 눈에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에안이 그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질렀다. 그의 가슴 안에서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던 불씨가 핏줄을 타고 손끝으로 옮겨붙어 마지막으로 빛을 내며 크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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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 미션 겸 개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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