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사람





 툭...투둑... 







 불규칙하게 걸리는 짧은 소음이 밖에서 비가 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후에 다시 생각해보면 굵은 빗방울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벽이 얇았을 리가 없었지만 그 때는 생각이 흐르는 길을 누군가 중간에 막아놓은 것처럼 정신이 반쯤 갈라진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 희망만이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환한 곳에서는 앞이 보이는 밝은 곳으로 아무렇게나 걸었고, 불이 꺼진 곳은 어두운 대로 벽을 짚으며 걸었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웃옷 주머니 자락이 주방에서 훔쳐온 식칼을 쥔 무거운 왼손 근처에서 손목을 스치며 흔들거렸다.




 어둡게 드문드문 보이는 계단을 한 차례 내려갔을 때 수영장으로 들어가는 탈의실 문을 지나쳐 쭉 안쪽으로 새까맣게 이어진 복도 끝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저 장소에 있을 법한 사람은 몇 명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고조된 끝없는 긴장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일부러 특정한 인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른다. 모른다. 나는 거기 있을 사람의 이름을 모를 것이다. 거기 있는 것은 그냥 내가 기억에서 잊어버린 어떤 사람일 것이다.




 핏기없는 새하얀 얼굴. 어깨너머로 넘어가던 빛 안 드는 까만 머리카락. 누나. 응, 예환아. 어젯밤에 꾼 꿈에서는 그렇게 평소처럼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서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혼자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복도 끝에 다다름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제일 처음 보인, 어제 꿈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뒷모습에 무심코 평생동안 입에 붙은 호칭을 부르려다가. 그대로 천천히 일어나서 불 꺼진 복도 쪽을 돌아보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뱉어내려던 짧은 말들이 그대로 굳어버리고, 이내 다시 시선을 그 아래로 흘렸다가 반쯤 열었던 입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박예환. 유달리 낯설게 들리는 세 글자가 잠시 끊겼다가 다시 조용한 양궁장을 채운 뒤 복도 밖으로 흘러넘쳤다. “봤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고, 지나치게 위태로워 보이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던 것처럼 멈춰있던 입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 거기 서서 말해. 움직이지 말고.”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내뱉자마자 굳은 상대방의 입가를 보고 후회할 단어들만 긁어모아 던진 것 같았다. 잠깐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먼발치 아래로 보이는 시체의 얼굴을 확인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다가 손과 발끝까지 차례로 구석구석 싸하게 핏줄처럼 퍼져나갔다. 죽은 사람에게 가지는 동정,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 안타까움,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은 것이 끔찍하게도 묵직한 안도감이었다. 이제 내가 저지르지 않아도 되어서.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척추 끝에서 새파란 추위가 올라왔다.




 백시연의 시선이 왼손으로 들고 온 칼끝에 머무르는 것이 보였다. 나도 그를 따라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이유를 모를 정도로 온몸이 차갑게 식었는데 꽉 막힌 눈가와 코끝만 혼자 뜨거웠다. 당장에라도 차라리 이대로 타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달아오른 고개를 들어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그 눈길에 대답했다. “이걸 어쩌냐.” 그렇게 말하고는 애써 웃으려 입꼬리를 틀었다. 이게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나도 비슷한 짓 하려고 가져온 건데.” “.......”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쓸모없게 됐네.” 다행히도 말야. 마음 속에 떠오른 소름 끼치는 뒷말은 붙일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을 것 같았다.




 칼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을 풀며 더이상 밖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지금까지 빗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냥 반쯤 뜯긴 소매 단추가 벽에 기대 걸을 때마다 부딪치면서 내는 소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차마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이 백시연의 눈을 보았다가, 허망한 얼굴로 생기 없는 형광등 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는 식칼의 날 끝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깨끗한 상태로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시연의 손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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