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nova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싶을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밖에서는 서늘한 밤바람과 정원의 장식품 위로 반사되는 달빛이 사람 키보다 큰 응접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다가 그 안쪽을 지배하고 있던 어둠에 막혀 그대로 돌아가고는 했다. 중앙의 빈 소파 대신 벽에 붙어있던 딱딱한 의자에 옆으로 틀어 앉은 사샤는 아무 것도 없는 방 중앙의 허공을 응시하며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손톱 대신 가죽으로 된 장갑 끝이 원목 테이블에 부딪치는 부드럽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몇몇 유령이나 인간들이 응접실에 들어올 때마다 불도 꺼 놓은 채 뭘 하고 있냐는 질문을 던진 사람도 있었지만 사샤는 계속 혼자 어떤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못 들은 척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러면 사람들은 이내 자기 볼 일만 마친 뒤에 방에서 나가보고는 했다. 분침이 정각을 지나는 시각마다 중앙 계단 쪽에 있던 시계가 종소리를 울렸고, 그 소리가 들릴 때가 되면 사샤가 문득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무의미하게 시간을 확인한 뒤에 다시 집어넣는 식의 행동도 몇 번 반복했었다. 한 번씩 화면을 노크할 때마다 전파 수신이 불가한 상태라는 상태 메시지가 액정 상단에서 깜박이다가 사라졌다. 한껏 가라앉은 밤이었다.
지금 기분이 나쁜가? 사샤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기분이 좋은가? 이번에는 확실히 '그건 아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새벽 두 시를 지나는 종이 다시 한 번 울리자,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한 사샤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애매한 기분들을 어떻게든 일단 마무리하고 쑤셔넣은 채로 적당히 옷가지를 챙겨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올라서 자기 방이 있던 왼쪽 대신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은 것은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창문과 복도가 모두 닫힌 2층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빛으로 복도를 간신히 비추는 작은 크기의 샹들리에와 촛불들만이 남아 있었다. 깨끗하지만 어딘가 우울한 벽지. 어둑한 조명. 발소리를 숨기는 카펫. 평소라면 반겼을 만한 요소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쪽 복도의 끝에는 아직 창문이 남아있었다. 그 때의 일이 상상가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창문이었다. 폭파와 함께 한 그을음이라든가, 바닥에 튄 핏자국이라도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어야 정상일 텐데, 고용인들이 이런 면에서는 철저하고 빠르게 정리를 모두 끝낸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창가를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떨어져 죽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깨끗한 정원이었다.
밤에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눈을 감을 때마다 아무 기억 없이 죽은 듯 잠에만 들었었던 사샤에게 이제는 낯선 경험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해가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고 심해처럼 새까만 어둠만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던 어느 산 위의 숲이었다. 인가나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길도 없이 빽빽한 나무 사이로 낙엽이나 나뭇잎 따위만 흙 위로 내려앉은 그 어두운 숲 속에 사샤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등 뒤로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왼손과 오른손이 자리하고 있던 양쪽으로는 바위나 나무 같은 풍경만이 보였고, 아무 쪽이나 일단 몇 걸음 걸어가보다가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멈춰 선 사샤에게 남은 방향의 선택지는 고개를 한 번 올려보는 것뿐이었다.
도시에서 자주 보았던 희끄무레하거나 칙칙한 빛의 잿빛 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푸른 광채를 섞은 새까만 물감을 그대로 짜서 풀어놓은 것 같은 캔버스 아래에서 흰 꽃잎을 흩어놓은 듯 반짝이며 빛나는 점들만이 사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고요하고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그는 모순적이고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일종의 압도와 허상이 어우러진, 편안한 긴장과 같은 감정이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정도로 잔인하게 새까맣고 커다란 그 색채가 시야에 다가올 수록 마치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로 떨어지다가, 이내 수압은 커녕 아직도 물 위에 반쯤 떠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과 같은 애매한 기분이었다. 사샤는 그제서야 슈리가 말했던, 그녀가 보아오던 별들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을 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샤는 저택에 오기 전 평소에 잠에 들기 전에 창문을 닫을 때마다 보았던, 점멸하던 가로등 불빛만이 유일하게 빛을 띄우는 수단이었던 그 탁한 회색 하늘을 잠깐 기억했다. 같은 시간을 살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밤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언급했었던 '가장 예쁜 별'을 찾아보기로 했다. 누군가 그걸 찾는 법을 가르쳐주기로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하늘 위로 촘촘히 박힌 별들은 그 하나하나를 따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서로 비슷해보였다. 어떤 별은 다른 별들보다 좀 더 크게 보였고, 어떤 별은 다른 별들보다 유독 빛나고 있었다. 흰 잉크로 된 폭죽을 터뜨려서 그대로 흩뜨려놓은 화면 같았다. 그 가르침이란 것을 아직 받지 못했으니 별을 보는 법을 알 리가 만무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휴대폰이라도 찾아보기 위해 품에 손을 넣었지만 그 대신 알 수 없는 종이쪽지만 한 장, 사샤의 손에 잡혀 딸려나왔다.
살짝 구겨진 듯한 종이 위에 어린 애가 급하게 손으로 쓴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 짧은 세 글자. 초대장. 주머니 안쪽 품에 넣어둔 채로 잊어버려서인지 약간 귀퉁이가 닳은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 접어놓았던 모양 그대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지금 당장 참고할 만한 약도조차 그려져있지 않았지만 사샤는 일단 종이에 쓰인 그 짧은 단어를 오랫동안 다시 천천히 되짚어보며 다시 아무렇게나 발걸음을 일단 옮기기 시작했다.
그 구불구불한 손글씨를 다시 보면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몇 주 전의 기억들이 사진첩처럼 한 장씩 꺼내져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공식적인 초청으로 카운트할 수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엉성한 초대장을 건네준 사람과 처음 만난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속에 적혔던 단어들이 떠올랐다. 어리다. 여자. 작다. 힘이 약하다. 혼자 높은 곳에서 내려오기 힘들어한다. 긴 머리. 밝은 눈동자. 주로 그런 정보들이 주로 사진첩 안으로 들어와서 쌓이기 시작했다. 특이하지 않은 인상이었다.
질문을 던지거나 눈에 들어올 때마다 하나씩 단어가 추가되었다.
별. 연구소.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팔짱. 접촉. 얇은 손목. 내가 좋다고 말함. 무섭지만 밝게 행동하는 중. 순진하다. 딱밤이 아픔.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한다. 잘 우는 사람. 걷는 모양새. 발소리. 표정. 이상한 사람.
이상한 사람. 슈리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즈음에 던져보았던 질문들은 일종의 관찰과도 같았다. 평소에 사샤 자신이 따라오던 사고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향의 사람이었던, 슈리의 존재는 그의 생활에서 일종의 변칙이었고, 사샤는 그를 어떻게든 한 번 캐내어 살펴보고 싶어했다. 어떤 반응이 나오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가? 이해를 할 수 있을 듯, 없을 듯 아슬아슬한 궁금증만이 피어올랐다. 왜 웃는가? 왜 우는가? 왜 슬퍼하는가? 가설을 세워보기 위해 일부러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법한 거짓말을 꺼내본 적도 있었다.
몇몇 날들은 반대로 질문이 돌아올 때도 있었다. 어떤 질문에는 사실대로 대답했고, 어떤 질문에는 거짓말로 대답했다. 후반에 꺼냈던 질문들이 차라리 쉬웠다. 거짓말을 하면 편했다. 반면에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해서 답을 미루어놓은 질문도 존재했다. 텅 빈 나뭇가지가 발 아래에서 바스러지는 마른 소리에 사샤는 잠깐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슈리 싫어요?
그 질문에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사샤 오빠도 슈리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이어서 터져나온 그 질문에만큼은 끝까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어느 쪽에 가까울 거라고 사샤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거짓말을 못 하는 타입이라고는 스스로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서 거짓말도 일단 시도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사샤는 그가 잠에 들기 전, 아무도 없던 응접실에서 왜 혼자 좋지 않은 기분을 풍기며 수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했는지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직 슈리가 죽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했는데. 물어보고 싶은 게 더 있었는데. 대답해야 할 것도 많았는데. 가야 할 곳이 많았는데. 궁금한 게 많았는데. 투정처럼 따라나오는 갖가지 이유들 끝에 마침표를 찍는 문장이 결국 나왔다. 그런 것들이 많았는데 죽어서 기분이 나빴다. 죽었다는 사실이 싫었다.
길도 없는 숲 속에서 무작정 아무 방향으로나 걸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사샤는 저 멀리서 어떤 사람 하나가 빽빽하던 나무조차 잦아들은 낮은 언덕 위에서 하늘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길다란 머리카락, 작은 체구, 밤에 실외로 나오기에는 조금 춥지 않을까 싶은 옷차림새까지. 눈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느 쪽으로 걸었든 여기로 만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꿈 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커다란 우연이었다. 언젠가 언급했었던 그 연구소라는 건물은 주위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있다는 것으도 약속은 충분할 것 같았다. 들고 있던 초대장을 다시 품에 넣은 사샤가 그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들. 예쁜 별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말이나 연구소를 구경시켜주겠다던 등의 약속들은 슈리의 생애가 결국 한 줌의 재로 끝나기 전까지 하나도 이룰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사샤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의문점 들 중 어떤 한 가지의 해답에 가장 가까운 말을 슈리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 심어주고 떠나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그만이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슈리가 그에게 반문했던 질문들 중에 유달리 대답할 수 없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슈리가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르쳐 준 적이 있었음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버석이는 낙엽 소리가 고요를 깨고 손을 어깨에 얹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가기 전까지 한 발자국 정도가 남았을 때, 앞에 있던 인영이 인기척을 들은 것처럼 천천히 사샤 쪽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향을 트는 어깨에 따라 그 위로 흐르듯이 얹혀있던 머리카락이 길게 흔들렸다. 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발끝이 땅에 닿는 순간이 한껏 늘어진 테이프를 재생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느린 것 같다고 느껴질 순간, 언젠가 슈리에게서 들었던 어떤 말이 그 뒤를 이어서 문득 사샤의 머리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분명 몇 주 되지도 않았을 때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한데도, 마치 물에 푹 잠긴채로 보는 먼 하늘의 별들처럼 기억 한편의 어딘가 흐릿하게 아득하고 먹먹한 말들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랫동안 관찰하기 힘들잖아요....
눈을 떴을 때, 자기 전에는 불을 모두 꺼두어 깜깜했었던 방 안은 이제는 커튼 새로 흘러오는 어둑한 빛으로 인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다섯 시.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에 비해 훨씬 이른 시각이었다. 꿈이군. 그렇게 작게 혼잣말을 읊었다. 꿈을 꾸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저택에 사는 또 어떤 고약한 유령이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령이라느니, 죽은 사람의 영혼이라느니, 그런 것들을 사샤도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와서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이야기까지 나눈 뒤에도 그 존재를 부정할 정도로 고집센 인간 또한 그는 아니었다. 꼭 최근에 죽어나간 사람이 아니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원한을 가진 유령이 몇 명 정도 밤마다 돌아다닌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장소였다, 이 저택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힘이 있었다.
차가운 물로 가볍게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뒤 사샤는 방문을 나섰다. 어제 밤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걸 깜박하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버렸기 때문에 다시 방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등 쪽이 조금 구겨진 것을 제외하곤 차림새가 별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창문 수가 적어서인지 복도는 아직 방보다 조금 더 어두운 상태였다. 서늘한 새벽빛이 들어오던 방의 창문에 비해 낮고 따뜻한 난색의 조명이 어제 밤처럼 그대로 복도 위를 비추고 있었다. 발걸음은 조용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며 평소 그랬던 것처럼 중앙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이번에는 쭉 앞으로 걸었다. 서쪽 복도 끝에는 어제도 보았던 창문이 있었다.
사샤는 창가를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어슴푸레한 서광. 서서히 동이 트는 것인지 텅 빈 정원 위로 새벽이 내려앉고 있었다. 누군가 그 위로 추락했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깨끗한 정원이었다. 기억에서 잊을 수 없던 그 새까만 밤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그 밝았던 빛과 함께 폭발해 마치 그대로 별이라도 되기 위해서 하늘로 날아가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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